수업

2002년 가을/2006.10.23

해떴다 2011. 10. 5. 11:04

주말에 문일고 샘들이랑 술 먹는 자리에서, '왜 학교를 떠났느냐' 는 질문을 받고 얼렁 뚱땅 대답을 했다. 좀전에 공 디스켓을 찾다가 우연히, 당시를 기억나게 하는 원고를 발견하였다. 우리교육에 보낸 원고인데 뭔가 어설픈 것이.... 아마도,손질중이었던 듯- 


.................................................................................... 
현장에 있을 때 나는 여러 차례 학급운영에 관한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마다 이렇게 말문을 열곤 했다. 
"제 꿈은 사직서를 쓰는 겁니다. 
검은 색 투피스를 단정하게 입고 하이힐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교장실로 가서 '사직서'라고 쓰인 하얀 봉투를 내미는 겁니다. 
'아니,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라고 묻는 교장선생님을 향해, 
'이유는 없습니다'(이 말을 할 때 나는 턱을 약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깔며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고 강의를 듣는 선생님들은 꼭 웃었다) 라고 짧게 대답하고는 그 길로 곧장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오는 것입니다. 단상에 서서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어쩌고....... '하는 절차 없이 후련하게 뒤도 한 번 안 돌아보고 말입니다........ " 
그리고 온 국민이 ‘꿈은 이루어진다’며 4강의 꿈을 이룬 2002년에 검은 투피스가 아닌, 좀은 점잖지 못한 초록색 손뜨개 옷을 입고 나는, 내 꿈이 담긴 하얀 봉투를 교장선생님께 내밀었다. 
그 때 교장실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너무 눈이 부셔서 눈은 내리깔았던 것 같은데....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와서 이유를 묻는 교장선생님께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라고 사직서에 쓴 글귀를 그대로 우물거렸던 것 같다. 그 순간 나는 금쪽 같은 새끼들을 버려 두고 새 서방을 따라 가겠노라고 고백하는 바람난 여편네처럼 부끄럽고 가슴이 아팠다. 그리곤 ‘어허... 이거 참...’하고 난감해 하시는 교장선생님을 피하듯 허둥거리며 나와선 여교사 화장실로 달려갔다. 
수돗물에 자꾸만 손을 씻으며 흑흑 느껴 울다가 빨개진 눈동자를 수습하려고 찬물을 적셔 눈두덩을 눌렀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거울을 향해 활짝 웃어보다가 나는 그만 엉엉 울고 말았다. 쉬는 시간 종소리가 울리고 꿈속처럼 들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아이들과의 마지막 종례 때 나는 아이들 가슴에 못을 꽝꽝 박는 소리만 해 댔다. 그동안 너희들이 나를 얼마나 서운하게 했는지, 누구와 누구의 어떤 행동 때문에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왜 그렇게 이기적인지, 왜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지, 왜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는 것인지, 니들은 왜 그렇게 엉망인 건지...... 아주 오랫동안 싸늘하게 퍼부어 댔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아이들은 ‘우린 네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듯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 목소리는 너무나 높았고 교실은 미치도록 조용했으며 아이들은 눈조차 깜박거리지 않았다. 나 역시도 발자국 하나 옮기지 못하고 한 자리에 못 박은 듯 서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쏘아대는 내 목소리에 절망하고 있었다. 이제, 그동안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자꾸만 말이 빗나갔고 내가 선 자리 바로 앞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주미의 까만 동공은 점점 더 커다랗게 열려갔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지금도 가슴을 후벼 파는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친한 선생님 몇 분과 저녁을 먹고 노래방에 가서 태연하게 노래까지 불렀다.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그리고 차를 몰아 집으로 왔고 대문 앞에서 다시 차를 돌려 아침마다 부지런한 반 아이들 몇과 아침 산책을 했던 백동 저수지로 갔고 캄캄한 저수지를 바라보며 목을 놓아 통곡을 했다. 사실은, 어리둥절한 아이들의 표정과 커다랗게 열려가던 주미의 눈동자가 잠시도 쉬지 않고 종일 나를 따라다녔던 것이다. 
바보 같은 눈물을 보이기가 그렇게 두려웠더냐, 이 등신아! 그렇게 헤어지는 게 아니었다...... 

나의 개인적인 사정이란 무엇이었던가. 
학교가, 교사로서의 생활이 그리 나빴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학교는 (어른들이 꿈꾸는)아이들의 장래와는 아랑곳없이 아이들과 실컷 사랑하고 즐긴 철없는 여자에게 돈까지 주는 신비한 나라였다. 
윗분들과, 윗분들의 윗분들이 바라는 교육의 방향이 나와 너무나 달라 숨이 막힐 듯한 순간도 많았지만 그 때 마다 오히려 더 용감해 지고 더 슬기로워 질 수 있었다. 마치 <파라다이스 로드>의 여주인공처럼. 
<파라다이스 로드>는 연합군 여자포로들이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수용소에서 희망이 없는 나날을 보내던 포로들이 감옥생활의 절망과 괴로움을 견뎌내기 위해 합창반을 만들어 간수들 몰래 조금씩 연습을 해서 드디어는 멋진 합창으로 완성해낸다는 이야기. 그것은 지혜로운 한 여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나는 영화 속의 지혜로운 여인처럼 잘 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이 길이 아니지만 일단은 가자’고 비굴하게 나를 속여야 할 때도 있었지만 나는 아이들을 위해, 아니지, 나를 위해 씩씩하게 견뎌 낼 수 있었다. 
아이들의 수용소가(부디 분노하지 마시길.....) 있어서 나는 부모님께 자식 키운 보람을 드릴 수 있었고, 남편의 실직 속에서도 우리 가족의 생계를 꾸려 갈 수 있었으며,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나의 명함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그렇다면 나의 개인적인 사정이란 누군가가 밀어내도 오히려 버텨내야만 하는 쪽이었다. 
내가 사직서를 낸 것은 여름방학을 하루 앞 둔 날이었는데 그 해 6, 7월은 그 어느 해 어느 달 보다 반 분위기가 좋았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마지막 학교생활이어선 지도 모른다 
경비 아저씨를 설득하여 캄캄한 밤에 교실에서 만나 함께 월드컵 경기를 응원했던 일은 물론이고, 바닷가로 갔던 현장학습, 교육청 공문에 의해 금연캠페인을 한 공적인 행사들도 전에 없이 좋았다. 나무판자에 온갖 구호를 써서 들고 정해진 코스를 돌아 학교로 오는, 사진을 몇 장 박아서 보고를 해야 하기에 실시하는 행사였는데도.... 
오후 수업 두 시간을 빼서 걷기엔 코스가 짧고 한 시간을 걷기엔 마지막 수업이 어수선해 진다는 분분한 의견 속에 진행된 우스운 행사였지만 택지 분양이 끝나지 않은 한적한 길들은 주민들의 눈에서도 벗어난 곳이라 줄 바로 서기 같은 통제도 하지 않았다. 직원회의 시간에는 ‘아이들의 탈선 장소, 우범 지역’으로 불려지는 곳이었지만 그곳은 가슴이 탁 트이도록 넓었고 산자락에 이어져 있어 아름다웠다. 곳곳에 자연소재로 만든 쉼터들이 있었고 잔디와 풀과 꽃들이 자라고 있었다. 여름이었지만 선선했고 교실로 돌아가 청소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 달엔 환경정화운동이란 명목으로 한 번 더 그런 행사가 있었다. 그 역시 사진을 박아서 교육청에 보내야 한다는 명목 때문이었지만...... 
그런 집단행사들에 문제의식이 아닌 자유를 느끼면서 나는 참 기분이 묘했다.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개구리. 어떤 상황에서도 다치지 않는 스폰지 인간. 자유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말 것만 같은 위기감. 
또, 6월 25일에 연중행사의 하나로 열렸던 사생대회 날은 학교 전체가 활동 장소였기에 나는 아이들이 몰려 나가버린 빈 교실에서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암송 액자에 바꿔 담을 글귀를 적고 있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기거나 좋은 것을 손에 넣으면 먼저 이웃과 함께 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아무리 먼 곳까지라도 그 좋은 것이 널리 퍼지게 된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샘! 이거 내가 젤 먼저 욀 건데요’ 
언제 다가왔는지 등 뒤에서 유진이가 낭랑한 목소리로 내가 쓴 글귀를 읽었다. 
그리고 마치 짠 것처럼 아이들이 한 명 두 명 들어왔고 그때마다 가슴이 저릿해 지는 만족감을 맛보았다. 평소처럼 우당탕 문을 열어젖힌 아이들이 카페 같은 우아한(?) 교실의 분위기에 덩달아 살금살금 자리로 와서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침 환경미화 기간이라 모둠끼리 앉아 소곤소곤(!) 거리며 자기 모둠이 맡은 게시판 꾸미기를 하는 아이들도 있고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는 아이들도 있었다. 어차피 백일장이며 사생대회에서 상을 받는 아이들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담당 선생님들이 들으면 기분이 나쁜 일이겠지만 살아있는 글 쓰기, 살아있는 그림 그리기가 아닌 ‘대회’이기 때문에) 아는 아이들에게는 그저 수업을 하지 않는 ‘홀가분한 시간’의 의미가 더 크다는 것을 알기에 문제 삼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혹시나 하고(영리하게도) 미리 준비한 캬라멜과 사탕을 나눠주었고 우리는 입을 오물거리며 평화롭게 그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어떤 기운이 아이들을 교실로 이끌었던 것일까.... 드디어는 거짓말처럼 두 세 개의 빈 의자만을 남기고 있던 차에 다른 반 아이 두 명이, ‘샘! 우리도 여기서 그리면 안돼요?’하고 찾아왔다. 
나는 좋다고 했는데 아이들은 안 된다고, 저 의자의 주인들이 돌아오면 어디에 앉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얌전해 뵈는 그 아이들에게 너무나 민망하고 미안했지만 괜히 말씨름이 길어지면 더 무안해 질까봐 나는 제 삼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림을 거의 다 낸 다음에는 아침 교육방송시간에 보던 영화를 마저 보았다. 
당시 우리 교장선생님은 학생들의 학력 신장을 위해 아침 8시 10분에서 9시까지 EBS교육방송을 틀도록 했다. 우리 반은 학급회의를 통해 그 방송을 보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대신 다른 반에게 방해가 되는 학급활동을 할 수는 없으므로 영화를 보기로 했던 것이었다. 
상상해 보라,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풍경-. 

전교생 모두가 교육방송을 보는 아침 시간, 교장선생님이 순시를 하다가 어느 학급의 TV화면에 나타난 여배우의 모습에 놀라서 교실로 들어오신다. 
“너희들 지금 뭐 하는 거냐!”하고 고함을 치다가 교실 뒤 사물함에 기대어 함께 영화를 보고 있는 담임을 보곤 더 놀라신다. 
“아니, 담임이 있는데도 아이들이 영화를 봅니까?” 
“네! 저희 반 아이들이 학급회의에서 결정한 일입니다” 
“아니, 선생님이 설득을 해서 아이들을 통솔해야지 아이들에게 그렇게 끌려 다니면 됩니까?” 
“학년부장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저희 반은 영화를 보기로 했다고-” 
“이 아이들이 우선은 좋다고 하겠지만 나중에 선생님을 원망할 겁니다” 
“좋은 영화만 직접 골라서 보여줍니다. 좋은 영상매체를 접하게 하는 것은......” 
“됐습니다. 누가 선생님보고 설교하라고 했습니까? 그럼 다른 반 선생님들은 뭐가 됩니까?” 

정말, 다른 선생님들은 뭐가 되는가.... 나는 정말 혼자 잘난 척 아이들 비위나 맞추는 그런 아니꼬운 선생인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더 이상 대답을 하기 힘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제 정년을 앞 둔 교장 선생님도 아이들을 위해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는 사실, 그 분 나름대로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나는 그 분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년이면 떠나실 분이니 올해만 눈 딱 감고 따른다는 것은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아니,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것인가.....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는, 아니 보고 있는 척 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을 아이들의 반들반들한 뒤통수에다 대고 ‘본인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하여.......’하고 마음속으로 사직서를 써 댔다. 그리고 교실 문을 나서는 교장선생님을 따라가 ‘네! 제가 나가죠, 제가 나가겠습니다!’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순간마다 쓴 사직서는 물론 셀 수 없이 많았다. 어찌 나뿐이겠는가. 
그러므로 나의 개인적인 사정이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숨쉬기처럼 당연하게 나와 함께 호흡하고 있었던 그런 것이었다. 무려 18년 동안을-. 
하지만 이제 나는 그렇게나 오랫동안을 이 집단의 공간과 집단의 시간이 가진 틀 속에서 당신들 몰래 꿀 같은 자유를 맛보고 있었다고 당신들 몰래 아이들과 함께 금지된 장난도 많이 해 보았다고 킥킥대고 있다는 것이 한심해 졌고, 어제처럼 오늘도, 오늘처럼 내일도 또 그 다음날도 온갖 잔머리를 굴려 조금씩 구해야 할 그 자유가 구차스러워 졌다. 
그래서 그랬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서 그랬다고, 견딜 수가 없었다고 변명하기로 한다. 그러면 완전한 자유를 갖고 싶었던 나의 이기심, 부모님보다도 가족보다도 아이들보다도 교육동지 보다도 더 중요했던 나의 개인적인 사정을 ‘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수많은 집단의 시간들, 그리고 관리자들’에게 돌릴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써놓고 나는 또 마구 불편해 진다. 
그럼 우린 뭐냐고, 너는 그렇게 훌쩍 떠날 수 있어서 좋겠다고, 참 잘났다...... 고, 아이들이, 선생님들이, 학부형들이 소리치는 듯 하여-. 

그곳을 떠나 이곳 모래실로 삶터를 옮긴 지 벌써 일년하고도 오 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아이들이 보고 싶어 훌쩍대며 울기도 했고, 17일마다 꼬박 꼬박 예쁘게 박히던 월급이 그리웠던 적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자유의 본질을 언제나 잃지 않고 살아낸다면 바로 나 자신인 아이들을 반드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임을. 내 발자국으로 낸 새로운 길로 걸어오는 아이들을 마중 할 수 있을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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