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버스정류장

1 박 2일의 여행 두 번째 날

해떴다 2012. 3. 14. 08:00

 

곡성에 강의 여행을 다녀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 굳이 그 시간들을 기록할 이유는 없으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은 터라 배설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어떤 이야기도 들어올 틈이 없어서.

 

화엄사에서 하룻밤을 보낸 재희와 나는 집으로 가는 길에 각자가 들리고 싶은 곳을 꼽았는데 나는 하동 악양, 재희는 진주 촉석루였다.

악양은 열한 살 때까지 내 몸과 마음이 가장 걸림 없이 자란 고향이고,

진주 촉석루는 재희가 아가씨적에 누군가와 함께 했던 시간을 추억하고자.

 

오직 섬진강만이 가진 느리고 무심하고 태만하고 태연하고 부드럽고 우아하며 소박한 모습, 넓으나 거대하지 않은 모래사장, 키 작고 성긴 대숲, 비탈마다 자라는 어린 녹차나무들을 보며 악양으로 가는 길, 우리들의 시간은 아름다웠다.

재희는 섬진강과 지리산이 좋아서 이곳으로 와서 살고 싶지만 땅값이 비싸서 쉽지 않은 일이라 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저 모래사장에 소풍을 갔던 날의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의 지시로 앞에 나가서 동요 뻐꾸기를 불렀고 우리 엄마는 함지박에 선생님들이 드실 음식을 가득 이고 오셨다는 둥의 이야기.

 

우리가 오던 방향에서 들어서는 악양 초입은 평사리. 평사리로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동정호가 있는데 어린날에 보던 그 호수와 완전히 달라져 버려서 놀랐다. 성형이 유행을 하고 모든 얼굴들이 비슷비슷해 진다더니 지자체가 도입된 이후로 관광 산업에 열을 올린 탓에 이름이 조금 알려진 곳은 모두 인간들처럼 성형을 해서 어디선가 본 듯한 흔한 조경이 되어버렸다. 생태공원을 만든다는 동정호도 그랬다. 땟국물이 흐르는 아이에게 손님이 온다고 허겁지겁 연회복을 입힌 것처럼 어색했다.

어릴 적에 나는, 언니가 동정호에 간다고 하면 물밤을 따러가는 것인 줄로 알아들었다. 동정호 주변엔 물밤나무가 많았는데 물밤은 보통 밤나무의 밤과는 달리 새까만 밤 한 톨 한 톨에 날카로운 가시가 붙어있었다. 그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삶은 물밤이 대바구니에 담겨있던 모습, 검은 껍질속의 흰 속살만은 눈에 선하다. 동정호의 옛 모습을 들려주는 내게 재희가 말했다. ‘언니는 고향이 있어서 좋겠다. 도시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고향이 없는 것과 같아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혜린은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책에서 그런 아이들을 아스팔트 킨트라고 묘사했다. 고향이 있어서 좋지만....... 어린날의 고향 풍경을 잃어버린 상실감에 허전했다.

 

몇 발짝 안가서 우리는 토지문학관안내판을 발견하고 들러보기로 했다. 아마도 7년 전엔가(그 때 엄마 등에 업혀있던 조카 홍이가 지금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으니) 엄마 아빠를 모시고 이곳에 왔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찍은 두 분의 사진을 뽑아놓고 아직도 전해드리지 못했다. 그 땐 최참판댁과 기념품을 파는 작은 가게 하나만 지어 놓았고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어린 나무들이며 주변 경관도 어설펐는데, 이젠 멀리서 찾아와도 실망하지 않을 만큼 제 꼴을 갖추었다.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집과 골목으로 꾸며진 마을, 박경리 기념관으로 가는 짧지 않은 길에 줄지어 늘어선 가게들과 산자락 풍경을 고려한 기념관의 위치까지..... 만족스러웠다. 내려오는 길에 기념으로 천리향 네그루를 샀다.

 

언니를 따라 다니던 빨래터며 나무하러 갈 때 오르던 산길 초입을 손가락질 하며 악양의 중심지인 정서리에 도착했다. 마을에서 가장 크고 근사한 일본식 집으로, 너른 정원 가득 뽕나무가 심겨져 있던 형진이네 집은 매암 차박물관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방문객들을 맞고 있었다. 웬일인지 문이 잠겨 있었으나 허리께에 오는 대문위로 손을 넣어 문고리를 풀고 들어가 보았다. 허술한 문단속으로 보아 편안한 침입(?)을 고려한 것도 같았지만, 언제든 제멋대로 드나들었던 집이어서인지 실례일까, 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린 나는 그 정원에서 입술이 검보랏빛이 되도록 오디를 따 먹었는데 지금은 단 한그루의 뽕나무도 남아있지 않고 녹차밭이 되어 있었다. 나와 형진이가 오목을 두거나 별판 놀이를 하던 커다란 마루는 차실이 되어있었는데 문이 잠겨있어서 통유리창으로 들여다보기만 했다. 앞머리를 뒤로 말끔하게 빗어 땋고 리본을 맨(내 머리는 손재주가 많은 작은 언니의 미장원 놀이용이었다) 어린 내가 놀던 자리.

형진이네 집에서 길만 건너면 있는, 내가 다닌 악양 국민학교의 돌계단을 올랐다. 돌계단을 다 올라서 몸을 돌려 바라보는 길 건너가 내가 자란 우체국 사택자리. 지각을 할 것 같으면 빙 둘러 와야 하는 길 대신에 돌담을 기어올라 폴짝 뛰어내리면 학교 정문이었다. 운동장은 잔디구장과 인공 레일을 만들어 이제 흙먼지가 날 일은 없어보였다.

장미숙과 김미숙, 그리고 명숙이와 땅바닥에 퍼대 앉아 흙먼지를 일으키며 공기놀이를 할 때 그늘을 만들어 준 커다란 버즘나무는 오히려 덩치가 줄어든 것 같았다.

구설수에 오르지 않으려고 나를 데리고 밤 나들이를 나간 이모랑 그네에 앉아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렸던(한 집에 살던 이모가 남자를 만나러 갈 때 언제나 나를 동행했던 이유를 그 때는 몰랐다.) 시간들. 달리기에서 늘 꼴찌를 했기에 출발선에 서면서부터 권태롭던 마음. 학교를 방문한 국회의원에게 꽃다발을 전하기 위해 엄마 손에 이끌려 미장원에서 올림머리를 하고 연지를 바른 얼굴로 꿈속처럼 고요하던 학교 운동장을 들어서던 일. 전교생이 줄을 서서 예방주사를 맞던 날, 슬금슬금 뒤로 자리를 바꾸면서도 고개를 빼고 바라보던 친구들의 찡그린 얼굴. 회충약을 먹고 노란 위액을 토해내던 순간의 메스꺼움.

4학년 때, 영문도 모른 채 도시의 학교로 전학을 가던 날, 울먹이느라 인사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바라보던 아픈 내 마음.(엄마의 왜곡된 교육열로 받은 상처를 나는 영원히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나를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을 한 남자아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시동이 걸린 버스차창으로 작은 노트를 건네주고 무너지던 그의 얼굴. 놀라움으로 뒤돌아보던 나, 차바퀴에 뽀얗게 피어나던 흙먼지.....

아스팔트가 깔려서 더 이상 먼지가 나지 않는 그 버스정류장을 돌아보는 것으로 나의 고향방문은 끝났다.

 

 

 

 

 

 

 

 

 

'카페 버스정류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실은...  (0) 2012.03.27
1박 2일의 여행, 첫 날 이야기  (0) 2012.02.21
나의 시절은-  (0) 2012.02.15
연탄  (0) 2012.02.06
무릎을 꿇는 대신  (0) 2012.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