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버스정류장

1박 2일의 여행, 첫 날 이야기

해떴다 2012. 2. 21. 07:47

곡성의 심청이야기마을이라는 연수원에 다녀왔다.

전남 최초의 공립대안고등학교인 한울고등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강의 한 꼭지를 맡게 되어서다.

워낙 먼 곳이고 대중교통으론 한두 번 갈아타서 갈 수 있는 곳도 아닌데다 직접 운전해서 먼 길을 가는데 대한 자신감(?) 부족으로 2월 초부터 전전긍긍했다. 게다가 배정된 시간이 오후 두 시라 강의 내용에 대한 걱정보다 실수 없이 그 시간에 도착 할 수 있을지가 더 신경 쓰였다. 그리하여,

 

나의 수호신인 재희가 그럼, 나도 이번 기회에 여행을 떠나지, 하고 기사를 자청했다. 정말로 여행이 하고 싶은 참이었고, 가고 싶은 곳도 지리산 자락이고 섬진강이었다니 다행이었다. 그리하여,

 

두 시간의 강의는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었고, 그런 만큼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떠날 수 있었다. 카페는 어떻게 했냐고? 카페는-, 나의 스폰서(!)인 혜자가 서울에서 일부러 내려와 이틀 동안 맡아주었다. 나라가 대신 할 수도 있었지만 나라는 감기가 시작되고 있는데다 아직 혜자만큼 든든한 실력은 못되기 때문에. 그리하여,

 

오전 8, 재희와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지난밤에 백구아저씨가 길 안내도와 네비게이션도 챙겨주었고, 재희도 나름 지도를 보고 머릿속에 정리해 왔기에 휴게소에서 쉬어가며 여유롭게 갔다. 정오를 지날 즈음 목적지에 도착했고 여유롭게 점심도 먹고 강의도 잘 마쳤다. 그리하여,

 

우리가 첫 목적지로 삼은 곳은 구례 화엄사였다. 화엄사에 가고 싶다고 하자(곡성에서 가까운 곳이기도 하고 4사자 석등을 보고 싶기도 해서) 재희도 화엄사에 가고 싶었다고 했다. 모두들 되돌아 나오는 시간인 오후 여섯시에, 아마도 매표소의 마지막 손님으로 입장을 했다어두워지고 있었고 바람은 드셌다. 산자락 아래 돌계단을 올라 석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돌계단 주위에서부터 시작되는 동백나무들은 푸른 잎들을 단단하게 붙들고 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한 겨울을 버텨내느라 잎들은 검붉게 얼어있었다. 마지막 계단을 딛고 올라 4사자 석등을 만났다. 오래전에, 15년도 더 전에, 우리 반 아이들과 이 석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더랬다. 이곳을 유난히 좋아하는 까닭은, 절 경내가 한 눈에 다 내려다보이는 위치에다 두 손에 연꽃을 감싸 쥐고 4사자 석등을 바라보는 독특한 비구니상 조각과 가슴을 뭉클하게 할 만큼 아름다운 오솔길이 있어서다. 그 오솔길로 걸어 들어가 쓰러진 지 오래되어 속이 텅 빈 고목등걸에 몸을 숨기고 쪼그려 앉아 실례(?)(나의 영역표시 버릇은 엄숙한 부처님 거처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사실, 땅에 거름을 준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발아래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부처님을 뵈려고 대웅전으로 향했다. 대웅전 문 가까이 도착했을 때 법고를 치는 소리가 들렸고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멈춰 서서 법고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회색 장삼자락을 휘두르며 커다란 법고를 북채로 두드리는 스님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노을을 (우리가 보려고만 한다면 언제나 거기 있는 노을을) 배경으로 누운 먼 산과 가까운 산, 동그랗게 절을 둘러싼 숲의 나무들과 함께 우리도 뿌리를 내린 나무가 되어 북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마도 그 북이 울기 시작한 첫 순간부터 그 소리를 듣고 있었을 오래된 나무와 바위들도 있을 것이고 태어나면서부터 들어왔을 새들이나 산짐승들, 벌레들도 있을 것이었다. 모두들 매일 이 시간과 이 순간엔 하던 일을 멈추고 숨죽여 북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으리라. 한 분의 스님이 북을 치고 돌아서자 동작과 소리를 끊지 않고 실을 잇듯 자연스럽게 다음 스님이 두 팔을 휘둘러 북을 치고, 또 다음 스님이 뒤를 잇고, 또 다음 스님이 뒤를 잇고.... 북으로 다가가는 다음 스님의 모습과 꽃잎이 떨어지듯 북으로부터 물러나는 스님의 고요하고 부드러운 동작이 이어졌다. 그렇게 북을 치고 난 스님 한 분 한 분은 법고가 있는 누각의 계단을 내려와 마당으로, 거처로, 기도처로 각각 걸어가셨는데 그 동작의 한결같음이 마치 세포분열을 하는 듯 했다. 북소리가 끝나자마자 그 여운을 이어받아 오른편 누각에서 범종 소리가 시작되었다. 중생을 깨우는 소리가 하늘로, 산으로, 땅속으로..... 세상을 향해 퍼져나갔다. 언제나 찾아드는 노을처럼 한결같이-. 우리가 보려고만 하면 볼 수 있는 노을을 보듯, 언제나 들으려고만 하면, 들을 수 있는 소리-. 한 번 칠 때마다 긴 여운을 남기는 종소리는 영원히 칠 것처럼 느릿느릿 이어졌고, 오랜 세월 조급함에 벌떡여 온 내 심장의 박동을 지긋이 눌러주었다. 어느새 별들이 돋아 있었고 언 코끝이 시려왔지만 꼼짝도 않고 홀린 듯 풍경과 소리에 취해있는데 재희가 팔짱을 끼며 배도 고프고 잘 곳도 찾아야 한다고 속삭였다. 그리하여,

 

절을 나서다가 재희가 여기서 템플 스테이도 할 텐데....’라고 했고, 우리는 절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 원주스님을 뵙고 방을 얻었다. <보시>라는 이름표를 단 방이었다. 방은 정갈하고 따뜻했다. 저녁공양이 끝난 시간이라 밥은 나가서 해결해야 했다. 다리를 뻗고 잠시 몸을 녹인 후 절 입구로 걸어 내려가 돌솥비빔밥과 재첩국을 먹고 들어왔다. 방바닥의 따뜻함과 산사의 고요함에 잠겨 눕자마자 나는(나만. 재희는 잠을 설쳐 꼬박 샜다고 함.) 곧 잠으로 빠져들었다잠의 바다에 잠겨드는 내 표정은 아마도 연꽃처럼 피어났을 것이다. 내가 듣고자 한다면 언제나 들을 수 있는 북소리, 내가 보려고만 한다면 언제든 볼 수 있는 노을을 가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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