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빈 집에 깃들다' 관련글

신협사보 9월호에 쓴 글

해떴다 2012. 9. 14. 00:04

 

지금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어린 사람이거나 나와 같은 연배이거나 더 어른일지도 모르는 당신에게, 어쩌면 나 자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인생의 정답을 모른다는 점에서 같은 사람인 당신과 마주앉아 무더위가 꺾여서 좋다느니 아쉽다느니, 하며 차 한 잔을 나누는 대신 편지를 씁니다. 당신과 나는 영원히 모르는 채 살아갈 확률이 높기 때문에,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겠지요.

 

물병자리에다 한밤중에 태어난 쥐띠여서인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맨발로 내달리고 싶은 나는 늘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말뚝에 매인 짐승처럼 현실에 발목 잡힌 채, 비행기며 배를 타거나, 오토바이며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거나 걸어서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오래도록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어려서, 두려워서, 가난해서, 아무 곳에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해서, 드디어는 며느리며 엄마가 되자 여행이 어쩌고 하는 욕망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18년의 직장 생활은 나에게 밥과 잠자리와 옷을 주었고 성취감과 보람도 안겨주었지만 자유로운 생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해야만 하는 일에 파묻혀 살다보니 하고 싶은 일은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의무감에 짓눌려 하는 일이 바람직한 결과를 낳기는 힘들었고 매사에 자아비판이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의무감을 버리기로 마음먹고 소유보다는 지쳐버린 영혼을 돌보는 쪽을 택했습니다. 내 영혼이 원하는 것은 자연의 품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내 세포가 기억하고 있는 행복의 원형일 것입니다. 나는 어린 날을 자연의 품속에서 자유롭게 뛰어놀았고 그것만이 온전한 행복이었던 것이지요. 자연의 품을 떠나야 했던 것은 세속적인 욕망 탓이었고, 욕망은, 누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견뎌야 하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나의 가장 순수한 욕망은 자유란 것을, 그리고 그것은 찾아 헤매야 얻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이미 가지고 있는 것임을, 단지 욕망을 버리는 순간 소유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마음 한 번 돌리면 극락이라는 쉬운 말도 있지만, 마음을 돌리는 순간 놓아버려야 할 것들을 얻느라 얼마나 힘들었던 지요. 20029, 마흔 셋의 나는 결국 잠재울 수 없는 어떤 기운을 누르지 못해 말뚝을 매단 채 내달리고 말았습니다. 여행은 포기할 수 있었으나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은 꼭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자유로운, 자연의 품에 안긴, 행복한 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아름다운 숲 속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사색을 즐겼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 그는 150여 년 전의 사람이지만 살아있는 누구보다도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너무 자주 여행을 한다거나 명소를 드나드는 것이 나의 정신을 완전히 고갈시키지 않을까 두렵다. 집안에서의 관찰을 집 밖에서의 관찰보다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집 밖이 아니라 집 안에서도 관찰 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말이다. 길은 멀리 돌수록 그만큼 가치가 없다. 여행하면서 관찰하는 대상은 대부분 육체적 사건이다. 그러나 집에 앉아서 관찰하는 대상은 대부분 정신적인 현상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보낸 하룻밤동안 오랜 기간의 여행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만일 생각을 양이 아닌 질로 판단해 볼 수 있다면 불면의 하룻밤이 긴 여행보다 더 많은 생각을 낳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불면의 하룻밤을 진정으로 누리기 위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산골마을의 빈 집에 안개처럼 스며들었습니다. 제도권의 따뜻한 지붕 아래로 돌아가는 대신 맨발로 흙을 밟고 맨 얼굴로 이웃들을 만났습니다. 꿈같은 십년이 흐르는 동안 발바닥에는 굳은살이배기고 얼굴에는 기미가 슬었습니다. 세상의 잣대에 맞추지 않고, 부모의 자랑스러운 자식으로 살지 않고, 남들과 보조를 맞춰 덩달아 사는 대신, 오로지 나 자신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당신이 이 편지를 끝까지 읽었을 지, 구겨버린 것은 아닌 지,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한 이기주의자라고 욕하지는 않을지 살짝 걱정이 됩니다. 마침표를 찍는 지금,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 끝에 서늘함이 묻어납니다. 연둣빛 점 하나로 세상을 만난 어린 싹은 진초록 잎을 완성하고 이제 붉어지는 일에 열중할 것이며, 모래알이나 다름없이 보였던 한 알의 씨앗은 번식의 기적을 증명할 것입니다. 자연의 일이 인간의 삶과 닮지 않은 것이 있을까요. 사계절을 나의 일생과 견주어 본다면 결실을 맺는 가을은 중년의 끝자락인 이 시점일 것입니다. 내가 따는 열매가 크고 달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수많은 어제의 정직한 결과물임을 압니다. 내게 남은 일은 이제 한 알의 씨앗에 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앞서 간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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