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빈 집에 깃들다' 관련글

생태귀농을 꿈꾸는 당신에게

해떴다 2012. 7. 6. 17:03

 

나는 지금 카페 일층의 세상을 보는 창이라 이름 붙인 공간에서 편지를 쓰고 있다. 카페는 지난해 1130일에 문을 연 나의 직장이다. 돈 한 푼 없이, 저당 잡힐 어떤 재산도 없이 무려 쉰 평이 넘는 사업체를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이 집에 반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뿐이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정말 그 이유뿐이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져 당시의 기록을 찾아보았다. 나는 매사를 확대 해석하는 버릇이 있으므로 나이에 맞게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어서다.

 

진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집을 보았다. 벽은 오래된 타일로, 베란다 난간은 낡은 쇠봉으로 이루어진 간결한 집이었지만 어쩐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집이었다. 딸아이에게 눈길을 끄는 집을 보았다고 호들갑을 떨었더니 '엄마는 구질구질하고 낡은 것은 다 좋아하잖아' 했다. 내가 좀 그렇긴 하다. 어쩌면 습관이거나 상황 탓이거나. 오랜 세월 동안 '가질 수 있는 것' 이 늘 헌 것이나 낡은 것이었으니, 비참해지기 싫어서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지. 가질 수 있는 것을 좋아하면 포기하지 않아도 되니까.

추석을 보내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다시 그 집을 보았다. 그 집 앞이 바로 함창버스정류장이었다. 내가 내려야 할 곳은 점촌 버스정류장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하는 차에서 허둥지둥 내렸다. 전화를 걸어 주인을 만나고 집의 내부를 돌아보았다.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맘에 들었고 월세도 싸기에 당장 계약을 했다.

내가 그 집이라고 기록한 이 집을 만난 날짜는 2011922, 이사한 날에 대한 기록은 107일로 되어 있다. 카페의 문을 연 후 12월부터는 거의 기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인생에 행복해질 의무가 있다

세상을 보는 창이라는 이름에 맞게 여기에서는 바깥세상이 잘 보인다. 길 건너에 고등학교가 있는데, 오전 8시 무렵이면 흰 셔츠에 남색 바지를 입고 검정색 가방을 멘 학생들이 등교를 하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덩치의 크고 작음을 제외하면 피로가 누적된 표정과 걸음걸이마저 비슷하다. 몸은 분명히 앞으로 가고 있는데 마음은 한없이 뒷걸음을 치는 듯 권태로워 보인다. 이것은 어쩌면 나의 경험에서 비롯된 감상적인 시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 중 일부만 그러하다고 하자.

배움의 기쁨을 잃어버린 채 배움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버텨내는 날들. 그런 날들은 교복과 가방을 벗을 때까지 이어지고, 어떤 이들에게는 직장과 가정생활에까지 이어진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어쩌면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일상이 축적되어 일생이 되는 것이니까. 그런 그들에게 삶의 다른 이름은 버티기.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없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이다라는 말을 남긴 헤르만 헤세도 학교 부적응아였다. 그는 사랑하는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학생의 의무를 견뎌내느라 결국 신경쇠약에 걸린 덕분에 학교를 그만둘 수 있었다. 그는 시인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는 자신의 한 가지 꿈만을 인생의 의무로 삼았고 이를 실현하였다. 알다시피 행복이란 꿈의 실현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가 이 지구별에 왔던 날로부터 무려 13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버티고 견디느라신경쇠약에 걸린 후에야 자신의 한 가지 의무를 생각해낸다.

 

뒤늦게 신경쇠약에 걸린 이가 생태귀농을 꿈꾸는 당신이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건, 일이나 일상이 자신의 꿈과 일치하여 지극히 자연스럽고 행복하다면 생태귀농을 꿈꾸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드디어 귀농을 하게 되었을 때, 자연의 품에 안긴 당신은 행복하라는 인생의 의무를 완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멋진 날들은 그다지 길지 않을지 모른다. 여전히 남들의 사는 방식을 기웃대는 한 다시 견디고 버티는일상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욕망을 창조해내고 자신이 창조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버티고 견디는습관이 이미 존재 방식이 되어버린 탓이다. 이는 당신을 가장 사랑했던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방식이고, 우리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달리고 있으니 함께 달려야 한다는. ‘라는 물음표를 달 시간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가야 한다는 응원과 기도의 에너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당신은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하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 문구에 뜨끔해진 적이 있다. 186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둔 바람에 연금 혜택을 받지 못한 내게는 그 말이 이십 년을 채우기 위해 버티고 견딘 당신은 떠날 자격이 있다로 해석되어서다. ‘버티고 견디지 않은 나는 생태적 삶은커녕 숨쉬기의 모든 순간에 돈 생각만 하고 살았으니까.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한 당신, 당신은 귀농을 하기에 앞서 버티고 견디는연습을 해야 한다. 당연히 사는 공간이 주는 힘을 믿으면 되지만 그 공간이 당신을 먹여 살리지는 못하므로. 그리고 당신은 오로지 배만 부르면 만족하는 인간이 아니므로.

그렇다면 도대체 어쩌라는 거냐고? 어차피 버티고 견디는건 마찬가지니 까짓, 저질러버리자는 생각과 힘들더라도 아직은 버티고 견디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는 당신을 다만 공감할 뿐이다.

'책 '빈 집에 깃들다' 관련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협사보 9월호에 쓴 글  (0) 2012.09.14
생태귀농을 꿈꾸는 당신에게 4  (0) 2012.08.13
서평을 쓰다  (0) 2011.11.06
인터뷰 - 전원생활   (0) 2011.10.24
인터뷰 -해피투데이  (0) 2011.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