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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쓰다

해떴다 2011. 11. 6. 22:51

<오늘의 교육>에 난생처음으로 서평이란 걸 썼다.

27일과 29일의 공연을 양쪽에 끼고 28일이 마감인 청탁이었다.

당연히 꼼꼼히 읽지도 숙성시켜 생각을 정리해 내지도 못했고, 공연을 마친 29일 밤에 졸면서 읽고, 30일에 썼고, 보냈다.

밤을 새워 썼다. (시월의 마지막날들을 참으로 바쁘게 보냈다.)

 

 

 

농부 예술가 웬델 베리의 가르침

- 《온 삶을 먹다》, 웬델 베리 씀, 이한중 옮김, 낮은산

 

 

 

 

 

1.

책 표지에서 일러 준대로 이 책은, 먹거리, 농사, 땅에 대한 성찰을 보여 준다. 그러니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남편의(!) 논이 어디쯤 있는지 정도만 알고, 채소 씨앗을 뿌렸으나 풀밭이 되어 버리는 텃밭 때문에 쌀 포대를 깔아 풀을 질식사시키기도 하는 내가 이 책의 서평을 쓴다는 것은.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작업을 수행하고자 웬델 베리를 만나고 난 지금, 내 입에선 “미타쿠예오야신!” 하는 외침이 절로 터져 나온다.

‘미타쿠예오야신’은 인디언에 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을 나코다족의 인사말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다’라는 뜻이다. 나와 부시 전 대통령이, 나와 부시맨이, 들고양이와 거리의 가로수가, 옹달샘과 바다가 다 연결되어 있다. 옆집 아줌마와 이웃 마을의 쓰레기와 모르는 아이의 분노와 내 자식의 안녕이 다 연결되어 있다……. 방사능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 끔찍해졌다가 웬델 베리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인다. 그는《온 삶을 먹다》에서 우리가 지금껏 괴롭혀 온 땅의 폐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임을, 그래서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2.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사무치게 다시 어린것의 엄마가 되고 싶었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꼭 필요한 것도 아닌 것을 마련하느라 시간과 기운을 뺏기지 않고, 돈으로 해결하는 대신 아이와 함께 살림 예술가가 되어 그 모든 과정을 누려 보고 싶다. 웬델 베리를 통해서, 살림이야말로 해치워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즐기고 누려야 할 창조 행위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강조한다. 돈으로 사는 대신에 가족이 스스로 기르거나 만들어 쓰며 기계나 석유에도 덜 의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웬델 베리는 살림으로서 농사를 설명할 방법을 찾던 중에 동년배인 테리 커민스의 《내 양을 먹이라》에서 그 답을 얻는다. 열세 살의 소년이었던 테리는 닭에게 모이를 주거나 찬비를 맞으며 바깥에 서 있는 양에게 외양간의 문을 열어 주는 일과 같은 작은 일들을 통해 자기가 생명이 있는 다른 것들을 돌보았다는 좋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살림으로서 농사이며 이는 각자가 갖는 개별적인 경험들이다. 그는 농업이 효율성과 수익성만을 앞세우는 것을 염려함과 동시에 지금의 어린 세대가 테리가 가졌던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들은 먹을거리가 어떻게 자신들의 밥상에까지 올라왔는지에 관심이 없으며, 장래 희망을 적는 란에 농업이라거나 농부라고 쓰지도 않는다. 도시 아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농촌 지역에서 자라는 아이들조차 농사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어서 이 답답하고 가난한 농촌을 벗어날 궁리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앞으로 농사를 짓고 땅을 돌볼 사람이 점점 부족해질 거란 사실이다. 인류의 생명을 책임지는 농업을 이어 가려면 경제적인 보장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현재의 정책으로는 소농이 살아남기 힘든 탓이다. 웬델 베리는 그럼에도 농민이 농사를 짓는 이유를 ‘사랑’ 때문이라고,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식물들의 성장을 도와주기, 가축이 있는 곳에서 살기, 밖에서 일하기, 일하는 곳에서 살기, 사는 곳에서 일하기를 좋아하며, “오직 인생의 일부만이라도 윗사람 없이 살기 위해서, 즉 자영업자가 되기 위해 그 많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3.

우리가 귀농할 당시 남편은 생태적인 삶에 관심이 있었지만 나는 ‘학교를 떠나 산골로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필요충분조건이 되었다. 그 속에는, 이제는 자연의 보살핌을 받는 자영업자인 농부가 될 것이니 나와 생각이 다른 동료들과 갈등하지 않아도 되리란 안도감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무시무시한 자연의 폭력과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상쇄할 만큼 귀농을 통해 얻을 자유와 독립에 대한 기대는 컸다. 그러나 나의 자유와 독립의 다른 이름은 도피이거나 권태, 삶에 대한 무력감 같은 것이었다.

이런 나에게 웬델 베리는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누리는 건실한 농부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삶이 얼마나 질적으로 풍요로운 것인지를 증명해 보였다. 그가 가장 바람직한 사례로 꼽는 아미시 농장의 빌 요더 씨네는 자녀 일곱 명이 모두 인근에 각자의 농장을 가지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산다. 그들 중 일부는 아주 척박한 땅을 가지고 농사를 시작해 지금은 그 땅을 비옥한 땅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모두 17세기 농법을 그대로 유지한 결과이다. 빌 요더 씨는 능력이 닿는 한 자녀들을 돕고, 그들에게 농사 스승이자 조언자로 남아 있으며, 자녀들은 그를 존경한다. 그들은 가족 공동체의 계속성을 염두에 두고 자녀들을 대하며 서로 존경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나는 공동체 생활을 좋아하지 않는 성향이라 이 책에서는 말하지 않는 공동체 생활의 어려움을 혼자 추측해 보며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삶에서 정말 마음에 들었던 대목이 있다.

 

'우리가 방문할 때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 있는 시간이 아닌 한 농장 헛간 같은 곳에서 일을 돕거나 일을 지켜보거나 일에 대해 들으면서 최선의 방법으로 농사를 배우고 있었다. 윌버(빌 요더의 아들 - 필자 주)는 열한 살 된 그의 아들이 말이 끄는 경운기로 옥수수 밭 23에이커를 갈았다고 했다. 빌은 자신이 윌버도 그렇게 가르쳤던 기억을 떠올렸다.' (본문 158쪽)

 

나는 윌버의 열한 살 된 아들이 옥수수 밭을 갈고 나서 느꼈을 자부심과 만족감을 생각해 보았다. 그 일을 마치고 난 후의 피로감과 밥맛과 그 밭에서 옥수수 싹이 올라올 때의 가슴 벅참과 수확 때의 자랑스러움, 결국은 그것을 먹을 때의 행복감까지를-. 그리고 우리 마을의 열한 살 된 소년이 고삐에 끌려가듯 학원에 가고 시험을 치고 “너를 위해 우리가 희생하는데 왜 이렇게밖에 못 하냐”고 비난을 받는 장면을 떠올리며 억울해졌다. 그 소년도 빌 요더의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옥수수 밭을 갈고 뿌듯한 얼굴로 저녁 식탁에 앉았을 테니까. 그리고 그러한 순간들이 모여서 그를 당당한 청년으로 성장하게 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단 한 푼의 학원비도 들지 않고 공부를 못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도 않고-.

내 친구는 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던 딸과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던 아들이 차례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들은 성적도 우수했고 다른 재능도 많았지만 학교 제도의 한계가 주는(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거라 믿는다) 비능률, 비효율을 참지 않기로 한 것이다. 물론 학교를 다녀야만 맛볼 수 있는 경험들을 포기하기까지 적지 않은 갈등을 겪었다. 그 후에 딸은 동네 어린이들의 공부를 가르쳐서 돈을 모은 다음 워킹홀리데이로 뉴질랜드에서 언어 공부와 여행을 하고 거기서 모은 돈으로 일본 여행을 한 다음 한국으로 돌아와 수유+너머에서 인문학 강좌를 수강하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들은 목수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집 짓는 일을 돕고 받은 품삯을 모으며 검정고시를 치르고 음악 학원에도 다니는 등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난한 나의 친구는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자녀들의 선언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아이들은 이해심 많은 엄마를 존경한다. 그 대신 그들은 유기농 계절 과일을 넉넉히 쟁여 놓고 먹으며 자주 영화를 보러 가고 여행도 다닌다. 그들 가족은 머지않아 ‘자격증’이나 ‘학력’보다 ‘경력’이 중시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은 적어도 밥을 굶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이젠 우리 사회에도 세상이, 학교가, 선생님이, 부모가 문제라고 투덜대는 대신 자유와 독립을 선언하는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추측건대 그 아이들의 공통점은 부모가 무척 단순한 사고를 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단순하다’는 말에 근거하여-.

 

4.

새 책을 사면 나는 제일 먼저 저자의 연보를 훑어보는 습관이 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웬델 베리는 스물한 살에 사랑에 빠졌고, 스물셋에 결혼을 했으며 스물넷에 아빠가 되었다. 그는 서른 살에 가능한 한 많은 먹을거리를 손수 기르기 위해 황량한 작은 농장을 샀는데, 그가 작은 농장을 샀을 시기 작은 산골 마을에 살던 나는 겨우 네 살이었다. 나는 웬델 베리라는 문패가 달린 작은 농장에 어린 나를 놓아 본다. 비쩍 말라서 아프리카 아이처럼 눈이 커다란 이 아이는 웬델 베리 아저씨가 아내에게 ‘알버트 하워드 경’의 책을 읽어 주거나 그가 한 일과 그의 생각을 열정적으로 들려주는 모습을 보고 있다. 이 어린아이조차도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만큼 웬델 베리는 ‘알버트 하워드 경’이라는 이름을 수없이 발음했다.

이 책에서는 하워드 경을 향한 웬델 베리의 존경심이 그만큼 강렬하게 느껴진다. 그는 서른 살에 하워드 경이 쓴 책을 읽기 시작하여 아직까지도(웬델 베리는 이 책이 출간된 2010년에 76세이다) 그의 책을 읽고 있다고 한다.

하워드 경의 농업에 대한 기본 전제는 자연의 한 과정인 탄생과 성장, 성숙, 죽음, 부식으로 반복되는 순환이다. 그가 볼 때 흙에서 자라고 사는 모든 생명들은 하나의 세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돼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영향을 미치며 살아간다.

 

건강한 생명들이 가득한 흙은 건강한 식물을 길러 낼 것이며, 그것을 먹은 가축과 인간은 그만큼 건강해질 것이다. 반면에 기름지지 않은 흙, 즉 미생물이 충분하지 않은 흙은 모종의 결함이 있는 식물을 길러 낼 것이고, 그런 식물을 먹은 가축과 인간은 모종의 결함을 이어받을 것이다. (본문 220쪽)

 

그는 성장과 부식 과정 사이의 균형을 깨는 빠른 성장은 흙의 양분을 탕진해 버리므로 더 이상 건실한 농업이 아니며, 농부는 도둑이 되어 버린다고 강조한다. 웬델 베리는 그가 농업이라는 주제를 다룬 방식이 삶을 다룬 방식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조기교육이나 선행 학습에 삶을 저당 잡힌 아이들, 그런 환경으로부터 소외된 아이들이 모두 모종의 결함을 안게 되리란 생각은 나의 지나친 과민 반응일까.

하워드 경이 위대한 것은 이런 단순한 진리를(진리는 단순하다는 말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흔들림 없이 글로 써 대고 행동으로 지켜 낸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농업의 순환을 재차 강조하는 글에서 “동양의 한 종교는 이 순환을 윤회라 부르는데 (……) 죽음은 삶을 대체하고 삶은 죽고 썩은 것으로부터 다시 일어난다”고도 썼다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킥킥 웃어 댔다. 이 동양의 한 종교는? 정답! 불교요! 하고 혼자 퀴즈 놀이도 하면서.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정답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답은 정답일 뿐 삶은 아닌, 그런 삶을 살고 있을 뿐.

하워드 경은 자신의 농업 교사가 식물과 동물의 병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돌보던 식물에 병이 들면 자신이 뭔가를 잘못해서라고 생각했고, 병해충이 생겼을 때 그것을 인공적인 방법, 즉 농약을 마구 뿌려 죽여 없애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회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농민들을 자신의 선생으로 존경했으며, 땅에 대한 그들의 앎을, 부지런함을, 정확한 눈을 높이 샀다. 그는 농민들의 경제적 기술적 여건도 자신의 작업 범위로 받아들였다. 그는 또 경솔한 혁신 때문에 자신의 도움을 받아야 할 농민들을 망칠 수 있음을 알았다. 그가 식물이나 병해충, 농민들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글로 쓰고 실천했다. 웬델 베리는 말한다. “그는 쉽고 힘 있고 단도직입적인 글을 썼고, 아마 말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은어 같은 전문어도, 가식적인 겸양도, 현학적인 과시도, 한가로운 말장난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쓴 책이 출판된다면 나는 당장 서점으로 달려갈 것 같다. 웬델 베리가 45년간이나 자신이 한 모든 작업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알버트 하워드 경의 책이니까.

 

5.

이 책의 역자 이한중은 〈옮긴이의 글〉에서 웬델 베리는 “좋은 삶이란 건강한 농촌 공동체에 적정 기술을 이용하여 지속 가능한 농업을 하며, 이웃과 땅을 보살피고 살리며, 건실한 먹을거리를 즐기는 삶”이라고 정리했다. 땅을 가꾸고 그 땅이 낳은 것들을 먹고 즐기는 삶, 그런 삶이 웬델 베리에겐 좋은 삶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런 삶으로부터 멀어진지는 이미 오래다. 웬델 베리는 연민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는 일터에 가기 위해 서둘러 끼니를 때우고, 저녁이나 주말 휴가 때 ‘레크리에이션’을 즐기기 위해 서둘러 일을 때운다. 그리고 최대한의 속도와 소음과 폭력을 다해 서둘러 레크리에이션을 때운다.” 이 말을 아이들의 입장에서 써 본다면, ‘학생들은 학교에 가기 위해 서둘러 끼니를 때우거나 굶고, 방과 후에는 학원에 가기 위해 거리의 분식점에서 라면이나 떡볶이로 끼니를 때우고, 교복에 몸을 맞추기 위해 먹는 즐거움을 포기한다’ 정도가 될 것이다.

귀농을 앞두고 있던 2002년 초여름, 부산 귀농학교 동기들과 함께 양산시의 후원을 받아 중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청소년 귀농학교를 진행한 적이 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던 강좌 중에서 수위를 낮춰 생태와 먹을거리에 대한 강의를 했고, 텃밭 농사와 천연 염색, 약용식물 채취 등의 실습 활동을 했다. 2박 3일 동안 먹은 모든 먹을거리는 당연히 유기농이었다.

학교로 돌아와 아이들이 보여 준 반응은 놀라웠다. 학교 급식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음료수 대신에 물을 먹겠다고 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은 먹을거리에 관한 한 절대로 써서는 안 될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다.

웬델 베리는 경고한다. “식품 산업이 주는 대로 받아먹는 사람은 먹는다는 게 농업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다. 먹는 일과 땅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거나 상상하지 못하며, 그래서 수동적이고 무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희생자인 것이다.” 그의 말처럼 우리 아이들을 그저 주는 것을 받아먹을 줄밖에 모르는 희생자로 키워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을 먹을 것인지, 자신이 먹는 것이 어디서 나고 어떻게 길러졌는지, 맛과 양보다 건강과 질이 먼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나 역시도 이론으로는 먹는 일과 땅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삶 속에서는 희생자의 모습으로 있을 때가 많다.

작년에 한 상자에 만 원 하는 토마토를 믹서에 갈아서 꾸준히 먹은 적이 있다. 그러다 한번은 아는 동생이랑 직접 농장에 토마토를 사러 가서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농장 안에 들어가 보았다. 거대한 유리 하우스 안에는 내 키의 두 배가 넘는 토마토 줄기들이 죽죽 뻗어 있었고, 마치 새로 산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상처도 없고 반짝거리는 붉은 토마토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런데 아래쪽을 보니 토마토 뿌리는 고작 150ml 우유곽만한 스티로폼 통에 담겨 있었다. 커다란 유리 온실 안에 흙은 한 줌도 없는데 토마토는 쉼 없이 상자에 담겨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날 나는 그 토마토를 샀다. 그러나 그것을 냉장고에서 꺼낼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고, 가족들과 함께 먹을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유리 온실 안에서 흙 한 줌 없이 조그만 스티로폼 속에서 자라던 그 모습이 계속 떠오른 탓이다. 사실 텃밭에 토마토를 직접 심어도 보았다. 하지만 거름을 주거나 지지대를 세우는 일을 게을리한 덕에 수확을 하지 못해 올해도 토마토를 사먹을 수밖에 없었다. 생명을 심고 거두고 먹는다는 게 또 쉬운 일만은 아님을 배웠다.

내년에는 충분한 거름과 단단한 지지대를 세워, 땅에서 새 줄기가 뻗고 꽃을 피우는 모습, 토마토가 푸른 열매를 맺고 붉게 익어 가는 모습을 함께 누리려 한다. 가장 맛있게 익었을 때를 알고 거두어 그의 온 삶을 먹으리라. 농부 예술가인 웬델 베리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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