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혜련에게4-메밀/2003.05.31

해떴다 2011. 10. 5. 10:46


5월 30일 

4월말에 씨를 뿌린 야생화 밭에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두 고랑 가득 반듯하게 자라 꽃을 화사하게 피운 메밀과 세고랑 가득 잘 자라준 아직은 어린 코스모스, 아직 꼴을 다 드러내지 않은, 목화(어쩌면 돌 콩)로 짐작되는 떡잎들, 그리고 아직은 이름을 알수 없지만 덩굴손을 내밀기 시작한 어떤 야생화... 

그러니까 무려 열다섯가지의 씨 중 메밀과 목화와 코스모스만 일반 종이었는데 그 놈들만 깨어나고 야생화는 한 종류만 세상구경을 한것입니다. 
덕배씨가 귀농하면 뜰에 심으려고 채취해 간직해 온 것을 이사온 집이 너무 좁아서 심을 데가 없다고 준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소중한 것이었을텐데 '거기서 다시 채취하면되죠'하며 씨앗마다 이름표를 단 작은 봉지들을 양철통에 담아 주었고, 난 햇살이 가장 잘 드는 양지에 위치한 작은 텃밭 하나에 골을 만들어 씨앗들을 뿌렸습니다. 이웃 어른들이 보면 쯧쯧혀를 찰거라는 걱정도 했지만 야생화들이 가득 피어난 화단을 상상해 보며 얼마나 가슴이 설레었던지.... 

풀씨들이 날아와 밭을 가득 덮어도 그 중 어느 놈이 야생화 싹일지 몰라 제 꼴을 드러낼 때까지 그냥 두고 보았고, '그래, 야생화는 풀들이랑 더불어 피어있으면 더 어울릴거야'라고 생각하며 아주머니의 '왜 저래 버려둔담'하는 눈짓을 모른 척 했습니다. 그건 정말 쉬운일이 아니었지만 후후거리며 터져나올 꽃들의 축제에 호스테스가 되기위해선 뻔뻔해 질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풀들이 자라 제 꼴을 드러내고 대부분이 '나? 명아주!','나? 비름' 하고 건들대기에 모두 뒤엎어버렸습니다. 코스모스는 뽑아서 길가로 옮겨 곳곳에 내던지듯 대충 박아놓고 목화(혹은 돌콩)와 아직 정체모를 야생화는 남겨두었습니다. 
가장 잘 자란 메밀은 너무빽빽하니까 솎아서 다른 줄에 심었습니다. 
두 줄이었던 메밀을 네 줄로 만들어 바라보니 제법 밭 같기도 하여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실 수확이 목적이 아니라 야생화와 더불어 꽃의 종류로서 심었던 것이라 '볼거리'로서 족했던 것이 '먹거리'입장으로 바뀌었으니 말이지요. 아직도 실속없이 '수확'에 대한 걱정보다는 마을 어른들 보기에 '밭 같은 지'가 더 신경이 쓰입니다. 
하여간 옮겨 심은 것이 잘 자라도록 손으로 꾹꾹 눌러주고 물도 듬뿍 주었습니다. 
처음 메밀이 있던 모습은 
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 

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 
이랬습니다(제대로 표현된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더 붙어 있고 더러는 엉겨있었지요)). 

솎아내서 간격조정을 해 준 다음의 밭 모습은 이랬습니다.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옮겨 심은 메밀)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옮겨 심은 메밀)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원래자리에 있는 메밀)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원래 자리에 있는 메밀) 

이렇게 번듯하게 만들어 놓은 것을 남편이 보더니 '야~ 당신 제법이네~'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봐도 멋졌고 이제 뿌리와 잎을 맘껏 뻗을 메밀에게 당당하게 웃어주었습니다. '흠...아주 좋아!'하며-. 

5월 31일 

어젠 날씨가 흐려서 일하기 딱 좋았고 일을 마친 오늘은 화창하게 개었고 
...상쾌함이란 이런 순간을 말하겠지...하며 숙련된 농부처럼 노련하게(!) 장화를 신고 메밀밭을 보러 갔습니다. 평화로움과 여유가 가득 찬 얼굴로-. 
그런데 밭의 모습, 아니, 메밀의 상태가 

ㅡ /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ㅣ ㅡ ㅣ ㅣ ㅣ ㅡ ㅣ ㅣ ㅣ ㅣ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너무나 놀랐습니다. 
뿌리를 옮겨온 메밀들은 한결같이 바닥에 얼굴을 늘어뜨리고 잎은 모두 시들어 있었습니다. 
첫째 줄 두번째 것은 완전히 눕지 않고 잎만 축 쳐져있었는데 잘 생각해 보니 흙을 통째로 잔뜩 옮겨 온 것이었습니다. 
넷째줄의 쓰러진 두개는 솎아낸 자리 간격이 너무 넓기에 다시 두개를 심은 것입니다. 
이 놀라운 정직함, 숨길 수 없는 진실 앞에서 나는 어쩔줄을 몰랐습니다. 
허둥지둥 소똥을 모아놓은 곳에 가서 오랜 삭혀 둔 똥을 퍼다가 첫째 줄과 둘째 줄, 그리고 넷째 줄의 시들어 버린 메밀 옆에 뿌려주고 물을 듬뿍 주었습니다. 평화롭고 여유롭게 둘러보러 왔다가 생각할 틈도 없이(노련한 모습이 달아나고 갑자기 초보가 되어) 나로 하여금 소똥을 푸게 하고 물조리개를 잡게 한 것은 시들어버린 메밀들이란 생각에 또 한 번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곳은 <교단>이 아니라 <화단>이라는 것, 이들은 아이들이 아니라 메밀꽃이라는 것, 나는 수업을 하는 교사가 아니라 물을 주고 풀을 뽑고 거름도 얹어주는 초임 농부라는 것.....그리고 소똥을 지금 얹어주는것이, 해가 있을 때 물을 주는 것이 잘못 된 방법 일 수도 있다고 불안해 하면서, 그래도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는 것, 그리고 나서 '성급하게도' 전혀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는 시든 메밀을 보며 속상해하는 것이.... 그런 스스로가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위대한 교사다'라는 말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 오후에 다시 보니 몇그루를 제외하곤 다 일어서 있었는데 그순간 위의 글들이(나의 흥분했던 모습, 충동적인 성격이 생각나서) 좀 쑥스러워 졌지만 그 순간의 진실이었으니 남겨두기로 합니다^^. 
 


'수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가정을 궁금해 하시는 정원이 어머니께-2003.06.08  (0) 2011.10.05
혜련(나의 벗들)에게/2003.06.18  (0) 2011.10.05
혜련에게3/2003.05.31  (0) 2011.10.05
혜련에게2/2003.04.29  (0) 2011.10.05
혜련에게1/2003.04.29  (0) 2011.10.05